케모노
나는 나의 성적 지향을 고등학교 입학할 때쯤 알았다. 사실 그 전까지는 야한 거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순수한 상태였다. 다른 친구들이 야동을 같이 보자고 해도 왜 보는지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었었다. 그런데 나의 성적 지향을 깨닫는 계기는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 어느 날 우연히 게이 19금 만화를 접했다가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 같았다. 그 이후 나는 게이라는 사실이 계속 고통스러웠고,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었다. 왠지 나 스스로 거리감을 두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활동을 해보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그쪽 사람이 없었고,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속으로만 계속 앓다가 안 되겠다 싶어 온라인 상에서 학교 주변 사람들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낯선 사람을 만나기에는 너무 두려웠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스텍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모임을 알게 된 계기는 어떤 웹툰과 관련이 있다. 지인이 연재하는 웹툰 중에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그려 놓은 웹툰이 있었다. 거기서 성적 소수자에 대해서도 다루었는데, 대학교의 성소수자 동아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그래서 혹시 포스텍도 이런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글에 검색을 해봤다. 역시 구글! POSTECH LinQ 페이지가 바로 나오는 것이었다.
처음 봤을 땐 매우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혹시라도 이런 모임 활동을 하다가 들키면 어쩌지? 혹은 아웃팅이라도 당해서 말로만 듣던 매장이라도 당하면…? 하지만 난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한데… 사실 나 한번 연애해보고도 싶고… (물론 환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새터 기간 중 3일 동안 혼자 계속 고민을 했다. 혹시나 신상이 털릴까봐 메일을 보내는 것도 주저했다. 하지만, 큰 맘 먹고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혼자만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잖아. 그래! 한번 해보자!’ 후회하더라도 한번 시도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을 해서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보냈다.
“혹시 POSTECH LinQ 맞으신가요?” 혹시라도 이메일을 잘못 보내면 어쩌지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메일을 확인하다가 3분 만에 답장이 왔다. 나는 그렇게 빨리 답장이 올 줄은 몰랐다. 답장 하나가 오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고 잔뜩 긴장이 됐다. 확인 했더니 “네 맞아요. 어쩐 일로 연락했나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조사를 했다. “혹시 포스텍에서 성소수자의 인식이 어떻게 되나요?” “혹시 모임 인원은 몇 명 정도 되나요?” “혹시 커밍아웃이나 아웃팅 당한 사람들이 있나요?” 등의 질문들을 했고, 그 이메일의 주인은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나는 점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분이 새터가 끝났을 때 같이 밥을 먹자고 했고, 나는 결국 수락해서 만나게 되었다.
새터가 끝나고, 나는 약속 장소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걸어서 도착했다. 어떤 키가 크고 훤칠한 사람이 눈에 잡혔지만, 나의 워낙 소심하고 조심하는 성격에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나한테 접근해서 “혹시 XX군 맞아요?”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한 말들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대이동으로 이동해서 짬뽕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 분은 매우 자상하고 친절했고, 웃음이 매력적이었다고 해야하나? 하여튼 친절하고 마음씨가 착한 분이었다. 덕분에 대화가 더 자연스럽고 긴장도 풀렸던 것 같다. 그 분이 했던 말들 중 기억나는 것들을 적어보자면 “생각보다 포스텍에는 숨어 지내는 성소수자들이 많다.” “연애에 환상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런 목적보다는 성소수자들끼리 고민도 해보고 성소수자들에 대해 알리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다음번엔 다른 사람들도 단체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날 든 생각은 ‘이 모임은 정말 괜찮다!’였다.
그 이후로 모임 사람들을 만나서 야식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친해졌다. 각각 다 독특한 성격과 특성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의 대화는 아주 재미있었다. 성소수자라는 틀을 씌우고 보더라도 전부 다 평범한 분반 선배, 과 선배들처럼 보였다. 나는 성소수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점이 있을 줄 알았지만, 성적 지향만 다를 뿐이지 다른 건 전부 다른 사람이랑 똑같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더군다나 나는 성적 지향이 같은 사람들과 터놓고 얘기 할 수 있어서 이때까지 숨겨왔던 얘기들을 해서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다시 한번 이 모임에 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내는 책자로 숨어있는 포스텍의 성소수자들이 이 모임에 와서 잠시나마 마음들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행물 > LINQ Vol.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의 정치집단과 성소수자 (0) | 2023.03.31 |
---|---|
성 문화사 (性 文化史) (0) | 2023.03.31 |
룸메에게 커밍아웃 했어요 (0) | 2023.03.31 |
이별 이야기 (0) | 2023.03.31 |
벚꽃, 그녀… (0) | 2023.03.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