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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LINQ Vol. III

낙타와 메르스

by 별빛요정 LINQ 2023. 4. 1.

망고

(언피씨 경고: 이 글은 고농도의 퀴어 혐오를 담고 있습니다.)

때는 메르스가 창궐하던 2015년 6월. 뉴스에서도 감염자 소식이 끊이질 않았고, 사람 들은 불안한 마음에 항시 마스크를 끼고 다녔으며 아무리 몸이 아파도 쉬이 병원으로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낙타 바이러스가 아무리 폴폴 날렸다 해도 이조차도 나의 서울 라이프를 막을 수는 없었는데, 오히려 나는 이런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출장을 잡아서 주 7일 중 3일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리고 내 L살이[각주:1] 인생 중에 잊혀지지 않는 낙타와의 조우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조우 당일, 생일을 맞은 이쪽[각주:2] 동생을 축하하기 위해 이쪽 언니 세 명과 내가 홍대에서 모였고 이 동생은 선물로 애인을 받고 싶다며 클럽에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혹하는 동생의 손을 꼬옥 잡고 클럽으로 향했는데, 이때는 잠시 잊고 있었다. 내 지난 클럽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을.

잠시 내 L클럽 방문기를 이야기해보자면 처음 L 클럽을 갔었을 때는 분위기에 맞춰 열 심히 흔드시는 금발의 천조국 언니를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그 당시 애인과 대판 싸웠었 고, 그 지지배가 당시 신촌이었던 본인 자취방으로 지 혼자 가버리는 바람에 첫차 뜰 때 까지 24시 카페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두 번째 방문 때에는 하필 부처님 오신 날 이브였는데, 같이 갔던 숫기 없는 친했던 동생이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시고 급 취해 버렸다. 연신 “땡큐 붓다”를 외치며 스테이지에서 열심히 뜀박질을 하던(정말 뛰었다. Jump) 그 아이는 집열쇠가 주머니에서 쏠랑 빠져버리는 바람에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쇠 찾는다고 진땀을 뺐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 이 동생과 점점 멀어졌던 듯 하다.

클럽만 갔다 하면 이런 식이었던 지라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나도 참 주책인 게 동생의 ‘오늘 같은 날은 여신들이 매우 넘쳐날 거야.’ 라는 사탕발림에 바로 넘어갔다.  불안하게도 그날따라 왜인지, 정말 왜인지 모르겠는데 클럽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게이다가 도는 사람들은 모두 투블럭 부치[각주:3]들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ㄹ’클럽. 길에서 만 났던 류준열들이 다들 이곳에 있을 줄이야..! 상심해서 클럽 입장 초부터 끝까지 정말 거의 데낄라만 마셨던 걸로 기억한다.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없지만, 그 당시 스테이지에서 열심히 춤을 추던 기골이 장대한 분들을 보고 ‘혹시 저 분 남성 아니니’라며 무례한 질문을 퍼붓다가 클럽에서 나왔는데 그때 시간이 아마 새벽 세시 반 정도였던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동행자들 모두 술로 떡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첫차 뜰 때까지 이쪽 술집에서 버티기로 하였다. 그들 중 세 언니는 아예 뻗었고, 생일자인 동생은 꽐라가 되 어있었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았던 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클럽에서의 오빠들을 기억에서 떨쳐내고자 순하리를 시켜 술잔을 기울였는데, 꽐라 동생도 나와 비슷한 기억이 맴 도는지 술잔을 꽉 채워 기울이기 시작했다. 뭐, 지도 속이 탔겠지. 썸을 픽업하려고 갔는데 썸은 개뿔, 잔뜩 치이고 왔으니까… 그렇게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취기가 엄청 올랐 고 동생과 나는 각자의 전 애인에 대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이-!, 연상들은 정말 개쓰레기예요오.. 난 앞으로 연하만 만날 거예요 연하아-.”
“야, 연하야 말로 정말 쓰레기야. 특히 더 짜증나는 게 뭔 줄 알아? 지들이 기대는 건 당연한 거고 정작 본인들은 기댈 어깨조차 안 내어주려는 거야-.”
“에이- 언니가 이상한 연하 만나서 그래요… 연하가 얼마나 섹시한대요오-”
“너가 이상한 연상 만났었나보네- 연상이 진국이지. 나 같은 연상 만나면 얼마나 좋을 까아…”
뭐 이런 류의 영양가없는 대화들이 오갔는데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바로 옆 테이블의 투블럭 집단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저기요.”
유독 속눈썹이 길고 얍샵하게 생긴 게 낙타를 빼다박은 투블럭 부치였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쫄보인 내가 “네..?”하고 대답하니 갑자기 내게 고민 상담을 해달란다. 
“저기 대화 들어보니까 저보다 언니신 거 같은데 제가 연상의 마음과 생각이 궁금해서 그러거든요. 고민 좀 들어주시면 안돼요?”
호모나.. 뭐지 이거?..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투블럭 집단 중 대가리로 추정되는 한 부치가 무게를 잡으며 낙타를 제지하기 시작했다.
“쓰읍. 야. 하지마.”
“잠깐만 언니.. 아.. 저.. 그게 제가 정말 힘든데요. 대체 연상들은 왜 그런 거예요? 언니는 연하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왜 썸타다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그래요?”

– 낙타 

그건 너가 연하라서 끊은 게 아니라 너의 낙타 외모 때문에 끊은 거 아니니!? 다소 당돌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간지러운 입을 자제시킨 후,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낙타의 설명에 의하면 본인과 썸타던 연상녀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잘 안 되고 새로운 썸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 본인이 방금 ‘ㄹ’클럽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그 연상녀를 마주쳤고, 본인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껴안고 있었다고 했다.
“정말 너무 억울한게요, 저 정말 벽장[각주:4]이거든요? 전 나름 용기도 낸거고 완전 진심이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전 정말 일 마치면 바로 집으로 귀가하는 전형적인 집순이라고요.. 근데 어떻게 이런 저를 두고 클럽에 있을 수가 있어요? ”
혹시 문짝 고장난 벽장인건가. 왜 집순이인 그대는 클럽에서 흔들고 있었던 것 일까. 
“음… 속상하시겠네요.. 근데 연상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그 사람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근데요, 사실 애매한 게 썸은 사귀는 단계가 아니니까 뭐라고 할 순 없잖아요. ”
“그야.. 그렇죠… 그래도 제가 해준 게 얼만데.. 진짜 나쁜 년이예요. 저도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아 그래도오- 걔 완전 패션 스타일도 안 좋았는데- 저 완전 패션 스타일 많이 보거든요? 옷 못입는 거 완전 싫어하는데- 그것도 이해할 만큼 사랑했다고요. ”
낙타는 그 당시 검은 색 쫄티 위에 헐렁한 흰색 반팔티를 입고, 그 위로 청바지를 야무지게 올려 가죽 벨트로 짱짱하게 고정시킨 패션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정말 너무 너무 없어서 매우 당황하고 있는 사이, 투블럭 집단의 대가리가 합석을 제안했다.
“너는 왜 쓸데없는 걸 말하고 그러냐. 저기 이거 튀김 좀 드세요. 같이 이야기나 합시다.”
“아.. 예예, 술은 여기 순하리 있는데, 이거 드셔요.”
“아, 저희는 이런 단맛 들어간 소주 안마셔요. 달아서 취하지도 않고.. 하하.”
“그렇구나.. 술이 쎄시네요. 저희는 여기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너무 마셨더니 그냥 소주는 힘드네요. 이슬이로 새로 시켜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오늘은 순하리를 마셔보지요. 그나저나 쟤(낙타) 얘기 신경쓰지 마세요. 쟤는 항상 저런 식이예요. 완전 호구.”
“아 예에….”
그 이후의 대가리와의 대화는 영양가가 참 없었다. 본인은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인생을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어떠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또 뭐더라, 요즘엔 L클럽에서 번호따기 전에 ‘팸[각주:5] 투 팸이세요?[각주:6]’라고 물어보는 게 기본 매너라며 그닥 고맙지 않은 팁을 가르쳐주었고.. 순하리 같은 단맛 나는 소주는 술이 아니라던 말이 무색하게, 대가리는 금방 취해서 본인 테이블로 돌아가 드러누웠다.
“저기요, 언니.”
조용했던 낙타가 다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네?”
“언니 정말 말 잘 통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의상실에서 일하는데, 언니는 어떤 일 하세요?”
교수한테 맨날 혼나고 맨날 밤새서 실험이란 이름의 노가다를 한다, 왜.
“어떤 일할 것 같아요? ”
유혹의 퀘스쳔은 전혀 아니고 그냥 알려주기 싫어서 낙타에게 되물었다.
“사무직이요. 경리 이런 거 있잖아요. ”
대체 어디가..!? 사무직 절대 무시하는 거 아닌데 살짝 기분이 안 좋았다. 딱 이 포인트에 기절해있던 한 언니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저 언니는 뭐 할 것 같나요”
“생산직..?”
경리와 생산직. 이렇게 구체적인 직종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해서 실소가 터졌다.
“풉, 아옼, 네, 근데 저 사무직 아니에예요. 저 언니도 나름 프로페셔널한 사람이구요. ”
“그렇구나. 근데 언니 좋은 사람인 거 같은데 막 고민상담도 많이 하고 싶은데.. 연락처 주고 싶은데…! 연락처 묻기엔 좀 미안하고….!”
“….”
그 이후로는 어떻게 뿌리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낙타에게 나 첫차 놓치면 안된다고 변명하면서 다급히 내 일행들을 깨워서 택시타고 황급히 자리를 떴었던 것 같다. 함께 택시를 탄 ‘생산직’ 이미지의 언니가 뒤늦게 낙타의 세포 하나 하나까지 욕보였지만 이미 그 자리엔 낙타는 없으니까, 뭐.
벌써 1년 전의 이야기지만 낙타와의 조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필 메르스 시즌에 낙타 닮은 투블럭 부치라니..! 왠지 모르게 나뿐만 아니라 연상인 L언니들 여럿의 기억에도 낙타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도 투블럭이 유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에 간 M바에도 부치들이 많이 점령해있던 것을 보았다. 10년대 초반의 팸, 부치의 비율 적절하던 그때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낙타와 같은 당돌한 부치는 그 이후로 만나보지는 못했다. 그날이 문득 떠오를 뿐만 아니라 대화 내용 하나 하나까지도 기억날 만큼 강력했던 낙타.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대화 내용에 과장이나 구라문장 하나도 없이 사실 그대로의 경험담임.)

 

  1. 편집자주: 레즈비언살이 [본문으로]
  2. 편집자주: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은어 [본문으로]
  3. 편집자주: 팸의 반대말 [본문으로]
  4. 편집자주: Coming out of closet하지 않은 상태. [본문으로]
  5. 편집자주: 부치의 반대말 [본문으로]
  6. 편집자주: 팸을 원하는 팸이세요? 이상한 일이지만 부치 투 부치는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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