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A
이 글의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일 수도, 어디에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회사원A는 서울에 있는 한 회사에 입사한 평범한 신입사원이었다. 그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생활에 뚜렷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채로운 맛집들, 문화생활을 비롯한 풍부한 즐길 거리,
그리고 수많은 게이들.
회사원A가 서울에 정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만남 어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역시 도시임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는 게이 인구 밀도에 그는 압도당하였다. 이렇게나 동지가 많다는 사실에 묘한 소속감이 밀려들어 왔다.
이런 좋은 첫인상 덕분이었는지 회사원A는 대도시의 삶에 차근차근 적응해 나갔다. 회사 생활도 익숙해져 갔고, 상사들의 따스한 조언들도 아낌없이 받을 수 있었다.
“A는 여자친구 없어? 얼른 여친 만들어야지~”
2
회사원A의 상사들 중 유별나게 친하게 지내던 상사B가 있었다. 첫인상도 호감이었거니와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호형호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회사원A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나’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깊게 친해질 수 없다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 상사B도 회사원A의 묘함을 감지하고서 슬쩍 떠보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가 신뢰할 만한 상대인가에 대해 심사숙고(이 과정은 인고의 시간이 수반한다)한 뒤 회사원A는 상사B에게 커밍아웃을 하였고, 그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회사에서 이리도 뜻깊고 소중한 존재를 알게 되어 회사원A는 감개무량했다.
훗날 상사B는 이미 회사원A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너 길거리에서 여자들한텐 눈길도 안 주고 남자들만 뚫어지게 쳐다보더라.”
이 이야기를 커밍아웃한 다른 이성애자 친구에게 했더니
“에이, 그런 걸로 어떻게 알아??”
라고 하였다.
회사원A는 조금 혼란해지고 말았다.
3
회사원A는 겁이 굉장히 많았다. 서울에서의 만남의 기회를 기대했지만, 자신감이 부족하여 행동하지는 않았다. 만남 어플에 얼굴 사진도 올리지 않고,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외모에 자신도 없었고 사진을 올리면 회사의 누군가가 보고 아웃팅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신 회사원A는 용기를 내서 종로에 있는 바에 혼자 가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회사원A는 어느 정도 인맥도 생기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
역시 서울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성과를 이루어 놓고서는 괜히 쑥스러운 듯 서울의 지리적 이점에 영광을 돌리는 회사원A의 용기 덕분인지, 어쨌든 순조롭게 이쪽 생활이 마련되는 것처럼 보였다.
상사B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 빼고는.
이성애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회사원A는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에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이리도 얄궂은 것이었다.
상사B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가 도와줄 것이 없는지를 걱정하였다.
참 인복은 기가 막히게 좋네, 하고 회사원A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상사B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회사원A는 지금도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다채로운 감정에 휩쓸려 넉다운 되어버린 적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하며 몸서리치곤 한단다.
4-1
회사원A의 친한 친구가 회사에 인턴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와는 회사원A가 커밍아웃한 뒤로 더욱 서로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아주 소중한 친구 사이였기에, 회사원A는 그녀와 종종 붙어 다니며 수다를 떠는 유쾌한 회사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ㅡ 그리고 이 진실을 아는 상사B는 동료 직원들에게 회사원A와 그녀가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여러 번 해명해야만 했다고 한다.
4-2
회사원A는 그 외에도 친하게 지내는 여성 사원들이 몇몇 있다. 그는 왜인지 어릴 적부터 여성들과 친하게 잘 지냈다. 모종의 친근감 때문인지. 이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회사 동료들이 회사원A와 마주쳤을 때
“올~ A씨 완전 카사노바야~”
라 하였다.
이를 듣고 회사원 A는 그러게, 차라리 카사노바였으면 좋겠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5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회사원A는 신입 테를 벗었고, 그동안 친했던 동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모종의 이유로 회사원A가 서울에 있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회사원A가 퇴근한 뒤 하는 일은 혼자서 취미에 몰두하거나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내거나, 정도였다.
만남 어플에는 이제 회사원A의 얼굴 사진도 올려져 있다. 어차피 어플에 회사 사람이 없기도 했고, ‘이젠 될 대로 되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패기는 상사B와 친구가 준 ‘세상이 험해도 내 편은 있다’라는 따스한 교훈 덕분인지, 더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무력감 덕분인지, 회사원A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얼굴을 공개한 탓에 몇몇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회사원A는 무슨 이유인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회사원A가 혼자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상황을 변호하는 변명거리 따위나 늘어놓는 것이었다.
‘퇴근하고 이것저것 하니 만날 시간이 없다’
‘조금만 더 살 빼고 몸 키워서 사람 만나야지’
‘어차피 조만간 서울을 뜰 거라 만나기 좀 그렇다’
‘내가 좋아했던 이들보다 괜찮은 사람이 없다’
등이나 지껄이며, 회사원A는 오늘 밤도 만남 어플이나 구경하다가 잠들어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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