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디
“남녀 사이에 친구 있다/없다” 논쟁 앞에서만은 유독 왜 그렇게 표정관리가 힘든지 모르겠다. 유성애-이성애 중심적인 기본 전제의 구림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순수한 친구 사이와 로맨틱/섹슈얼한 끌림을 느끼는 잠재적 연인 사이 중 하나로 설정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접할 때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말하기를 포기하곤 한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유의미하게 진전된 논의가 있는지 궁금해져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역시나 비슷한 논쟁이 여기저기서 한창이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주장 몇 개를 가져왔다.
- “둘 다 성적 매력이 없으면 가능” : 인간관계, 특히나 친밀한 관계는 적어도 어떠한 끌림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외모/성격적으로 전혀 본인에게 매력 없는 사람과 친구하고 싶을 리는 없지 않나? 이 말대로라면 성적 매력이 넘쳐나는 사람은 진정한 이성친구를 단 한 명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였으면 가능” :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는 서로 간에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는 주장. 그렇다면 평생의 이성친구 관계는 유년 시절의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
- “서로 끌리는 관계는 알고 보면 진정한 친구는 아님” :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 끌림을 느끼는 “불순한” 관계를 “진정한 친구”로부터 분리해내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단순한 지인이거나 단체로 술만 같이 마시는 사이에서는 끌림을 느끼는 게 가능하다는 식. 이러한 주장처럼 정말 가깝고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친구라면 어떠한 종류의 끌림을 느껴서도 안 되고 어떠한 성적 접촉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게이 은어 중에 ‘우정박’이라는 용어가 있다. 성관계를 맺는 행위를 ‘박을 탄다’고 표현하는데, ‘우정박’은 ‘우정’과 ‘-박’이 합쳐진 형태로 (연인관계는 아닌) 친구 사이의 우정섹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영어로는 이러한 관계를 FWB(Friends With Benefits)라고 하는데,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성적인 즐거움도 함께 누리는 그야말로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관계인 셈이다. 둘은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데, 친구(일체의 섹슈얼리티를 배제한 정신적 유대관계)-연인(정신적으로는 로맨틱, 육체적으로는 섹슈얼한 끌림으로 유지되는 독점적 관계)의 이분법적 구조에 저항하고 본인에게 적합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는 점이다. 키스를 했건 오럴섹스를 했건 삽입섹스를 했건, 그 모든 것들은 서로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면서도 친밀감을 높여주는 농도 짙은 스킨쉽일 뿐이다. 1
나와 꾸준히 친하게 지내는 게이 친구들 중 몇몇도 나와 직간접적인 성관계를 맺었던 역사가 있다. 우정박으로 다져진 참-호모우정이라 하겠다. 오랜 시간 특별한 끌림 없이 서로 막 대하는 사이로 지내왔는데 술과 분위기에 취해 섹스 한 번 뜬 친구,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섹슈얼 텐션이 팽팽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친하게만 지내다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겨 같이 모텔에 갔던 친구, 원나잇 상대로 만났다가 섹스 후 몸도 말도 잘 통해서 급속도로 친해진 친구,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고등학생 때 기숙사에서 동거동락하며 성적 접촉이 잦았던 지금은 헤테로섹슈얼이 되어버린 동성친구들. 이들과 현재에도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이따금 섹슈얼 텐션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경험상 친구 사이의 적당한 성적 긴장감이나 성적인 접촉은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한다.
나는 늘 섹스라는 행위를 낭만적 사랑의 관계 안에만 가두려는 시선이 달갑지 않았다. 단순히 쾌락을 위한, 유희로서의 섹스를 즐기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에서는 ‘우정박’이 게이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견고하게 하는 환대와 위로의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 서로 통하는 친구끼리 여가생활을 함께 즐기는 것과 몸 맞는 친구끼리 섹스 한 번 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서로의 몸 혹은 육체적 행위를 원하면서도 진정한 친구 사이에는 절대로 어떠한 “불순한” 접촉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2
일부 퀴어혐오세력들은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관측되는 이렇듯 자유롭고 특수한 성문화를 보고 “동성애자들은 문란하다”, “동성애는 성중독”이라고 비난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본인의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더욱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관계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들은 “낭만적이고 고귀한” 사랑과 “숭고하고 참된” 우정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를 애써 외면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여성착취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남성중심의 성엄숙주의 타파로 귀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하지만, 말하기 터부시되어왔던 보수적 성 가치관에 의문을 가지고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더욱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녀 간 진정한 우정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문란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친구 사이에 고추 한 번 빠는 게 뭐가 어때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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