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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LINQ Vol. IV

깊은 생각 : 첫 번째 이야기, 관성의 법칙

by 별빛요정 LINQ 2023. 4. 2.

산나리

뉴턴의 운동 법칙에서 뉴턴은 ‘관성의 법칙’을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고 정의했다. 필자는 물리와는 척을 두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관성의 법칙으로 역설하고 싶다. 하지만 또한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다. 내가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초원을 뛰노는 짐승들과 차별화된, 더 진화한 인류임을 역설하고자 할 때 물리를 포함한 현대과학을 빼놓을 수 없음을.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물리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리 길진 않지만 내 생애 전부를 통틀어 관찰한 현실이라는 시험관 속에서 몸소 느껴온 ‘관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록 그 짧은 관찰 기간으로 인한 오류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 글을 혹여 읽게 될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고등학생 시절의 난 학교 규정을 지키지 않는 다소 발칙한 학생이었다. “왜 학생다움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머리 길이와 교복의 길이, 폭을 재단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화장을 짙게 하고 할 수 있는 한 다리에 짝 달라붙는 교복을 입고 등교했다. 물론 머리도 길게 휘날리며. (코르셋에 관한 논의는 두 번째 ‘깊은 생각’에서 다루어보려 합니다. ☺) 지난밤 두툼한 솜이불의 온기가 모두 식어버릴 때쯤, 교무실에 꿇어앉아 모욕적으로 반성문을 쓰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도대체 그깟 화장이, 세탁소 아주머님이 손수 잘라 예쁘게 수선한 교복이 왜 그렇게 선생님들을 화나게 했을까? 나는 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실내화로 만들어내는 소음과 먼지들을 먹으며 누구에게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 걸까? 둥근 머리를 굴리며 혹시 불쾌했을 학우들과 선생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죄책감에 대한 짧은 소설의 집필을 끝으로 학생주임 선생님께 갔다. 

“산나리, 앞으로도 그럴 거가?”

(그게 멍청하게 나이를 뒷구멍으로 잡수신 분에게 무릎을 꿇으며 헌법에서 규정한 자유를 침해하는 당신들의 늙어빠진 사고에 장단 맞추는 것이라면)“아뇨!”

물론 난 수능을 몇 주 앞두고 세상이 마치 수능을 위해 제작된 하드 트레이닝 육성게임인 것 같았던 날들을 제외하고는 작은 나의 시위를 계속했다. 검정 머리가 지겨워서 염색도 하고 더운 여름 불편한 교복을 껴입지 않고 체육복을 입고 등교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칫 포스텍에서 이 책을 집필하지 못할 뻔도 했다) 누군가 고등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다면 한사코 사양할 이유 중 하나가 선생님들과의 혈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난 교실과 교무실을 오가며 나의 어머니, 아버지뻘의 선생님들에게 열심히 개인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했다. 입시 철이 다가오자 담임선생님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를 더 이상 구속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일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학생으로서 학교 규정을 지켜야 할 의무, 다른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내 생각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엄마에게 자식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냐는 식으로 전화를 했던 담임선생님, 한 세기쯤 전에 활동하던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교과서의 소수자들에 대해 불편함과 혐오를 내비치고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나의 자존감을 짓밟으려던 윤리 선생님. 나의 정의에, 나의 존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그때의 시간이 너무나 미웠지만 그립다. 작년에 모교를 방문해 친했던 선생님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오랜만에 본 윤리 선생님을 보자 왠지 모르게 너무 반가워 꼭 안아드렸다. 선생님도 나의 등을 어루만져 주셨다.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아닌 한 사람으로 그녀가 보였고 3년간 보이지 않았던 주름과 흰 머리가 눈시울을 시큰거리게 했다. 

기숙사에서 공강 시간에 포털 사이트를 헤엄쳐 다니다 우연히 본 두발 규제 완화에 관한 기사를 보고 ‘학생 때는 수수하게 다니는 게 참 예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니?”

사실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투쟁의 과거가 더 이상 뜨거운 화두가 아닌 그 순간부터 학생의 자유와 인권에 대해 나는 너무도 차갑게 식어갔다. 학생은, 적어도 고등학생은 의무교육이 아닌 이상 자신의 선택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입학한 그 순간부터 학교에서 정한 규정에 발맞추어 서는 것이 완전무결하게 옳진 않을지라도 모두가 편한 길이지 않을까? 만약 그 규칙이 잘못되었다면 열렬히 저항하거나 규탄해서 규정을 바꾸던가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속해있던 집단을 벗어나는 것이 서로에게 ‘윈-윈’이지 않을까? 조금 더 고민한 후, 나는 또 한 번 떠올렸다. 우리는 관성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시험관 속 뉴턴의 쇠구슬이라는 것을. 각자의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보수성을 갖고 있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누군가는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최적의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또 다른 이는 자신이 속한 이 집단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들이 가득한 이곳이 나를 하나의 조각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하나를 이루어가길 원하는 소망 때문이다.

선생님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자 한다. 우린 함께 살아가야 함을. 그의 세상도 나의 세상도 함께 하나를 이루고 우리는 좋든 싫든 살갗을 맞닿으며 가끔은 싸우고 투쟁할지라도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또 우리의 세상은 명백한 흑과 백이 아니라 너무도 찬란한 가지각색의 빛들이 존재한다. 자유와 인권이 장려되는 현대에 이르러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변화에 대해, 둔감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들 가운데 후자는 변화의 비용을 기꺼이 감수해 기울어져 있던 저울을 올바로 해야 한다. 조금은 암울하지만, 우리의 숙명이라 생각한다. 물론 전자는 본인들에게 유리했던 저울을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살을 깎아내야 할 것이다.

조금씩 그때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기에 손 놓아선 안 될 것이다. 추운 날 촛불을 흔들던 마음과 더운 여름 깃발을 흔들던 열정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듯하다. 끝으로 필자는 믿으려 한다. 환경이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관성의 법칙 속 쇠구슬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고. 임계점에 도달하는 그 순간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듯 더 정의로운 방향으로 몸을 틀어 열렬히 흔든 깃발의 힘을 우리의 질량으로 나눈 가속도만큼 멈추지 않고 달려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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