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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LINQ Vol. IV

소심남의 LGBT 성지 탐험기 : 샌프란시스코

by POSTECH LINQ 2023. 4. 13.

전사

이곳의 공기는 내가 아는 여느 7월의 것보다 다소 차가웠다. 북태평양의 차가운 바닷물이 한여름의 강력한 더위를 끌어내리고 그 대가로 금문교에 걸리는 안개를 선물했다. 북미 여타 도시들에 비해, 대중교통은 훌륭했다. 공항에서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은 피부와 머리색, 영어와 영어가 아닌 갖가지 언어들이 섞인 다양한 사람들의 숨내음이 가득했다. 캘리포니아 전반이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다른 곳과 비교해도 샌프란시스코는 분명 백인과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경계가 가장 불분명해 보였다. 또한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와 그 외의 주류인 사람들의 경계 또한 흐렸다. 어쨌든, 당시에는 이것을 알고자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케이블카와 AT&T Park (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 단 두 가지뿐, 특히 야구가 가장 중요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 샌프란시스코도 처음에는 미국의 다른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알려진 정설은 이곳이 세계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 있었던 군인들이 돌아오는 항구였는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지한 군인들이 정착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본다. 또한 1960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존 틀을 벗어난 자유와 평화, 사회적 차별의 반대에 대한 의견을 중심으로 한 히피 문화가 이곳 샌프란에서 태동하여 만개했다. (특히 버클리 지역이 히피운동의 중심지역인데 지금까지도 그 분위기를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이후 히피문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변종들로 갈라지고 쇠퇴, 일부는 타락하여 현재 그들에 대한 평가는 다소 부정적이거나, 이를 추억하는 무리로 나뉜다. 이와는 별개로 이러한 운동에 힘입어 사회적 소수자들이 샌프란으로 모여들어 단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샌프란에서 자유분방하게 활보하는 성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카스트로 거리이다. 여행을 떠났던 시기엔 내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엄격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성에 대한 호기심은 엄격한 부정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인지, 짧은 일정을 조막내어 본능적으로 카스트로 거리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일반적이고 보수적인 성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당황을 넘어서 현실과 마주하니 카스트로는 게이들에게 자유로운 낙원이다. 그들은 도시에서 분리된 공간이 아닌 다운타운과 근접한 교외 주거지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자신들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다운타운에서 트램 F 선을 따라 10분 내려오면 카스트로 역을 만난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상점마다 나부끼는 무지개 깃발이다. 가로수와 가로등은 무지개 깃발로 뒤덮여 이곳은 누가 보아도 LGBT 성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게이들, 카페에 늘어선 파라솔에 담겨 수다를 떠는 수많은 게이들은 매우 자유로워 보였다. 특히 나이든 게이들이 행복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괄목할 만했다. 나를 포함한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쳐다보는 관광객들, 그리고 그것이 일상인 듯 무심코 입을 맞추는 게이 커플들의 오묘한 분위기가 온통 가득하다. 거리를 조금만 걷다 보면 이곳의 관광명소인 무지개 횡단보도 (Rainbow Crosswalk)를 만날 수 있다. 사거리에 그려진 4개의 횡단보도가 무지개색깔로 되어 있어서 이곳이 자유와 평등의 중심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또한 이 자체만으로 아기자기하고 예쁘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거리를 누비며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장소를 찾아본다. 꽤 너른 창문 안으로 비치는 각종 잡지, 비디오, 난생 처음 보는 성인용품에 어리둥절하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들여가기 망설여지는 마음 앞에 비집고 들어오는 원초적인 본능이 나를 상점 안으로 이끈다. 그 사이엔 거리낌 없이 거리를 노닐다가 서적을 뒤적거리는 수많은 게이들이 화끈해진 나의 두 뺨을 공기처럼 무심히 스쳐가고 있었다. 그 누구의 시선보다 나는 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 나중에 들켜버릴까 겁이 많았던 것인지 게이샵에서의 아무런 시각적 기록물이 없다. 그러나 그 상점 안에서 뇌리에 깔끔하게 꽂혀있는 생생한 기억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아무리 다양한 인종들이 있다고 한들 내가 본 모습으로는 카스트로에선 백인과 히스패닉이 다수였다. 당시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내 모습, 그리고 아시아인으로써 가지는 젊음의 버프를 받아 아마 그 넓은 샵에서 내가 가장 어리게 보였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서, 남자들에게 그렇게 달콤한 눈빛을 한눈에 받아보는 경험은 아마 절대로 흔하지 않다. 혐오의 눈빛보다는 분명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들과 내가 육체적인 차이가 상당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와 서적, 그리고 애니메이션, 만화책, 엄청난 비주얼을 자랑하는 갖가지 용품들이 파도가 되어 나에게 몰아치는데, 나의 서핑보드는 그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 결국 파도를 타 보지도 못하고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만다.

이렇게 첫 번째 가게에서 허둥지둥 탈출한다. 좀 더 어슬렁거리며 살펴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이 이런 섹스토이 상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단체들의 본진도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규모가 작아서 실망스럽겠지만 ‘GLBT 역사박물관’이 있으며, 여느 지역과 다를 바 없는 미용실, 커피점, 음식점, 술집, 옷가게 등 생활에 밀착한 평범한 동네다. 단지 우리네 동네와 다른 점이라면 그러한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과 찾아주는 사람 중 LGBT의 비율이 높다는 것뿐이었다. 이들에게 이곳은 매우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아쉽게도 밤에 방문하지 못하여 거리 곳곳에 위치한 게이바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길거리 게이 이야기만 하면 아쉬우니 카스트로 거리 주변 볼거리를 간단히 소개한다. 카스트로 거리를 따라 북서쪽으로 약간만 걷다보면 헤이트 애시베리에 도착한다. 히피문화의 온상지이며 지금 역시 히피들의 자유분방함이 그대로 나타나는 상점들과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띈다. 거리에 즐비한 온갖 벽화들과 개성 넘치는 사람들 뒤엔 빅토리아 양식의 고풍스러운 양식의 집들이 병풍마냥 서있다. 아름다운 주택들을 계속 보고 싶다면 바로 옆 동네인 콜 벨리로 가면 된다. 이미 유명한 전망대 포인트인 트윈 피크스를 가기 부담스럽다면, 카스트로 거리 바로 위쪽에 위치한 코로나 헤이츠 공원으로 가도 샌프란시스코 전경을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단, 자유와 평등의 낙원이라고 해서 샌프란시스코 전반적 치안이 훌륭한 편이 아니다. 공격적인 홈리스(거지)들이 많고 후미진 곳에는 마약 냄새가 진동한다. 본인은 밤 외출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변에 위협적인 상황을 수시로 목격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여행을 간다면 언급했던 지역들 모두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시빅센터, 텐덜로인 지역, 미션 16번가 인근은 낮에는 긴장하고 구경하되 저녁 이후에는 절대 방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카스트로 지역은 해가 지면 밤이라는 불이 새로 켜지는데 밤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방문해 보기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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