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간행물/LINQ Vol. IV

부남자가 들려주는 BL과 재정체화 이야기

by POSTECH LINQ 2023. 4. 15.

스님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기숙사에 살았던 고등학교 때는 환경이 여의치 않았을 테니 중학교 때 한창 열심히 봤을 것이다. 커밍아웃한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카페나 커뮤니티에 접근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당나귀 아이콘 P2P 프로그램으로 불법다운 해서 컴퓨터 구석에 꼭꼭 숨겨둔 BL만화들을 보는 것은 내 섹슈얼리티의 거의 전부였고, 완전히 고립된 세계였다.

BL(Boys’ Love)은 남성(주로 미소년) 간의 사랑을 다루는 모든 형태의 창작물과 그것을 (또는 ‘그런’ 코드로 다른 것들을) 소비하는 문화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1차 창작물로는 내가 주로 봤던 만화와 애니, 영화, 소설, 게임 등이 있고, 2차 창작물에는 동인지, 팬픽 등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찾아보면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야마네 아야노, 타카나가 하나코, 사쿠라가 메이 같은 일본 작가들의 만화를 많이 봤고, 생각해보니 『데스노트』 동인지(소위 L月 커플)도 꽤 있었다. 다른 것도 많았는데 원작을 몰라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やまねあやの, 『ファインダ-の標的 キャラクタ- ガイドブック』: http://ariuf.co.kr/shop/shopdetail.html?branduid=10962&search=&sort=

 

▶ Death Note BL Game <緊縛王子>: http://animeobsession.blog.cz/0707/death-note

 

지금이야 다 BL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여성향’이라는 용어도 꽤 많이 쓰였다. 그래서 만나보지는 못했어도 ‘아 이런 거 보는 여자들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했던 그 시절에 BL이라는 장르는, 동성애 혐오와 적절히 버무려져 부당하게 매도되곤 했다. 후조시(腐女子. 부녀자婦女子의 첫 자를 ‘썩을 부’로 바꾼 말)라는 자조적인 용어도 그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것 아니었을까. 주로 여성에 의한 남성의 성적대상화라는 점에서, BL이 ‘미러링’의 초기 형태와 관련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관심이 있다면 후조시 문화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한 <일다>의 기획 기사[각주:1]를">http://ildaro.com/sub_read.html?uid=7824.[/footnote]를 추천한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와서, 내가 BL만화를 보던 것은 게이로 첫 정체화를 하기 전이었다. 분명히 해둘 것은, 나는 그 만화들을 재미로 본 것이 아니라(물론 재밌으면 더 좋지만) 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봤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는 남자인데 남자끼리 섹스하는 만화를 보니까 게이구나’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도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성적 끌림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로맨틱 끌림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없었던 때였으니까. 고등학교에 가서 짝사랑하는 남자애도 생겼는데, 그 애에 대한 끌림과 BL만화를 볼 때의 욕망을 섬세하게 구별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조시 문화에는 ‘화분 시점’이라는 말이 있다. 나야 남자니까 헷갈릴 만했지만, BL을 보는 여성이 남남 커플 중 하나에 이입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상상을 하는 등 성적 욕망의 적극적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소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성애물과 확연히 비교되는 BL만화의 구도, 인물 배치 방식 등이 ‘객체로서의 소비’를 이미 의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화분 시점’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다> 기획 기사[각주:2]에서 이를 여러가지로 해석하며 무성애 이야기도 하고 있지만, 뜬금없는 회색무성애(gray-Asexual)보다는 무성애 스펙트럼 중 하나인 오토코리섹슈얼(Autochorissexual, 자기부재성애)이 이 시점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오토코리섹슈얼은 성적 판타지와 흥분의 대상은 있지만 그 대상과 자신을 연결짓지 않는 것으로, ‘주체’가 없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딴 이름이다. 나도 최근에는 이 용어로 다시 정체화를 하고 있다.

Autochorisexual Pride Flag: http://lgbta.wikia.com/wiki/Autochorisexual

 

みちのく アタミ, 『腐男子高校生活』: https://bookstore.yahoo.co.jp/shoshi-522187/

별 말을 다 만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성소수자 중에도 그런 사람 많다), 나에게는 이제야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말이니 함부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런 관점에서 후조시 문화, 게이 문화와 별개로 ‘BL을 보는 남자’에 대한 조명도 BL문화의 일부로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BL 중에 그런 설정의 만화도 있다. 주인공이 부腐남자[각주:3]...)

대학에 와서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생기고 BL을 장르 중 하나로 공식화한 만화 플랫폼도 나오기 시작해서, 주로 유료 웹툰의 형태로 BL만화를 보고 있다. 하지만 LINQ에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BL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BL은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에서도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삶을 미화하고 대상화하며, 판타지 수준으로 왜곡한다는 지적도 중요하지만, 주된 논점은 BL문화의 핵심이기도 한 ‘공X수’ 개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攻(세메攻め)과 수受(우케受け)는 BL창작의 기본이 되는 남남 커플링의 ‘장르적 역할’로, 주로 공이 능동적/적극적으로, 수는 수동적/소극적으로 그려진다. 작품 내에 삽입 섹스에 대한 묘사가 있는 경우에는 주로 공이 수에게 삽입을 하게 되나, 그런 묘사가 없는 경우에도 대체로 잘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게이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탑(Top), 바텀(Bottom)과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개념이 오히려 레즈비언 문화의 부치(Butch), 펨(Femme)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LINQ 책자에서도 부치, 펨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주지 못해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글이 있었다. 우리가 부치/펨을 정의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용어가 처음에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정의되고 사용되었는지와 무관하게, 커뮤니티가 수십 년 이어오며 겹겹이 축적한, 문화적으로 구성된 정의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치가 ‘남성적’인 레즈비언을 가리키는 말이냐고 물어보면 “어디 부치를 남자 따위에 갖다 대” 이게 정론인 것으로 보인다.

▲ YES24 이벤트, [BL만화] 경찰공X조폭수 야수처럼!: http://m.yes24.com/event/eventdetail?eventno=151238

마찬가지로 공X수 개념 역시 BL문화가 축적한 ‘구성된 정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장르가 가지는 하나의 특성이지, 이분법적 연애 규범을 강화한다거나, 게이의 삶을 왜곡한다거나 하는 혐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다. 예컨대 가벼운 히어로 만화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등장인물의 선/악은 장르의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 놀이’에 불과하다. 물론 세상에는 절대선/절대악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역시 심오하고 좋은 작품이지만, 작품 내에서 선/악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세상의 현실을 왜곡하거나 독자의 정의(正義) 관념에 악영향을 주는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BL은 논쟁적인 장르이다. 아이돌 팬픽 문화는 실존 인물의 성적 대상화 문제가 걸려있고, 안 그래도 여성 서사가 부족한 여러 창작 분야에서 여성 등장인물의 역할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지적 역시 아프게 들어야할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왜 이성애 연애물은 ‘로맨스/성인’으로 분류하면서, 남남 커플의 연애에는 BL이라는 예외적인 딱지를 붙여야 하는가? 언젠가는 없어져야 마땅한 장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BL은 그 모호한 정의만큼이나 유연한 장르이고, 이러한 비판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많은 이들에 의해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이성애중심주의가 확고한 만큼, BL이라는 틀 아래서 좀 더 다양한 변주를 즐겨도 크게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BL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몇몇 작품을 추천하는 글을 쓰려고 했는데 중심을 못 잡아서 다소 딱딱한 글이 되었다. 예전부터 쎄하긴 했지만 BL에 강세를 보이던 L모 플랫폼이 더 이상 상종을 못 할 지경이 되면서, 추천할만한 작품이 거의 없어져 버린 탓도 있다. 하지만 끝내기 전에 한 작품 영업하자면, 북큐브에서 연재 중인 보바리 작가의 <남의 BL만화>가 가히 이 시대 최고의 BL이라 할 만하니 많이들 가서 봐 주셨으면 좋겠다. 어흙흙 우리 애기들 행복하자!

보바리, <남의 BL만화>: https://www.bookcube.com/toon/detail.asp?webtoon_num=160161

 

  1. 물체주머니, “후조시(腐女子)를 모르다니요!”,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7년 4월 2일, [본문으로]
  2. 물체주머니, “화분시점의 즐거움, 정말인가요?”,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2017년 5월 25일, http://ildaro.com/sub_read.html?uid=7884&section=sc7. [본문으로]
  3. 흔히 쓰는 말은 아니지만 ‘부녀자(후조시)’에 대응해서 ‘BL을 보는 남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본문으로]

댓글